"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군요. 하지만 당신의 혼례를 관장할 사람은 비스그라쥬백이 아니라 납니다. 그리고 나는 사십 일 후 당신의 답변을 듣기 전까지는 어떤 준비에도 착수하지 않을 작정입니다."
정우는 엘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.
인간보다는 도깨비의 눈빛에 더 익숙한 그녀였지만 정우는 엘시의 눈에서 거짓된 점을 찾을 수 없었다.
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.
"정말 제 의견을 존중하실 건가요?"
"그럴 겁니다."
"비스그라쥬백이 아니라 폐하께서 저를 결혼시키라고 명령하셔도 제 의견을 더 존중하실 건가요?"
"정우."
"아니군요."
엘시는 곤혹스러웠다. 그 곤혹스러움은 익숙했다.
갑작스러운 분노를 느낀 엘시는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.
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.
"바르지 못합니다."
"네?"
"규리하공. 그런 부당한 조건을 걸어서 당신을 존중하려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일은 바르지 못합니다. 왜 성의를 가지고 당신을 대하려는 사람을 괴롭힙니까. 당신의 조력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부탁하여 그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 재미있지도, 당신에게 도움되지도 않을 텐데요."
"어머, 대장군님?"
"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계를 가진 사람입니다. 내 도움을 얻고 싶다면 우선 내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십시오. 그런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저 무수한 바보들처럼 굴지 마십시오. 그런 바보들이 오해를 만들어내고, 그런 바보들이 세상이 원래 각박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듭니다."
"대장군님. 죄송해요. 폐하를 거론한 것은 그냥 해 본 소리였을 뿐이에요. 그건 제 무력하고 답답한 심정을 말하고 싶어서……
전 정말이지 대장군님이 폐하께 대항하면서까지 제 뜻을 따라주길 바란 적이 없어요."
엘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.
정우는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.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. 하지만 정우는 그 분노의 대상을 오해하고 있었다.
그 순간 엘시는 정우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.
엘시는 자신이 한 말을 들을 대상이 정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. 사과해야 한다고 느꼈지만, 설명이 지나치게 많이 필요했다.
엘시는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. 인사 같기도 하고 외면 같기도 한 모호한 동작이었다.
"쉬십시오. 화한을 받을 사람을 있다가 보내겠습니다."
엘시는 뒤로 돌아섰다.
방문 앞에 선 엘시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.
정우는 똑같은 자세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.
엘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.
- 피를 마시는 새, 이영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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